이 기사는 바둑TV에 게재된 중앙일보 박치문 전문위원의 글로 세계 최초로 본격 상금제를 실시하는 비씨카드배 출범에 맞춰 유창혁 9단과 나눈 인터뷰 내용입니다.


1월22일, 서울 시청을 마주보고 있는 프라자 호텔에서 의미심장한 조인식이 열렸다. 이 조인식과 함께 ‘64강 상금제’와 무제한의 ‘오픈전’을 전면에 내건 제1회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이 출범했다.

대회는 2월21일 아마추어 최종예선전부터 시작된다. 박수가 쏟아졌다. 만감이 교차했다. 만리장성을 넘기보다 힘들게 느껴졌던 상금제가 드디어 실현됐다. 물론 한국기원 프로기사 모두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비난과 분노, 줄기찬 반대도 있었다. 그러나 이 대회가 무한한 희망을 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더구나 바둑이 위기에 직면한 시점에 이런 대회가 시작된다는 것이 모종의 위안마저 안겨주고 있었다.

상금제의 실현을 위해 지난 몇 년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중심인물인 유창혁 9단(한국기원 상임이사)을 만났다. 상금제의 전말과 앞으로의 전망, 목표 등을 들어봤다.

-바야흐로 한국 바둑의 역사를 바꿀만한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 것 같다. 상금제와 오픈전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가?

(유창혁 9단) “상금제는 50여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대국료’ 제도가 사라지고 64강 이상에게만 상금이 지급된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프로기사는 지든 이기든 바둑을 두면 대국료를 받았다. 한데 이제 64강에 들지 못하면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오픈전’은 몇몇 세계대회서 이미 시행하고 있지만 이번 오픈전은 성격이 다르다. 이 대회엔 아마추어 든 연구생이든,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누구나 무제한으로 참가가 가능하다. 연구생이 참가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오픈전은 비씨카드배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유창혁 9단) “국내 아마추어가 먼저 인터넷으로 예선전을 치러 최종예선 진출자를 선발한다. 연구생 60명과 국내 아마랭킹 64위 이상, 그리고 외국 아마추어는 최종예선에 직행하고 이 최종예선에서 20명을 뽑는다. 이 20명은 프로와 동일한 자격으로 본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선발전에 뽑힌 20명에겐 비씨카드 측에서 기전 상금과 별도로 장학금 100만원씩을 지급한다. 이들 아마추어들이 64강 이상에 오를 경우 상금은 50%를 받게 된다.”

(※한국기원 연구생은 자격증만 없을 뿐 실력은 프로기사에 못지않다는 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동안 프로 준비생이란 이유로 프로대회는 물론 아마대회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매년 10명만 입단할 수 있기에 병목현상이 심하고 그나마 만18세까지 프로 입단을 하지 못하면 연구생을 떠나야 한다. )

-앞으로 기존의 모든 대회가 비씨카드배 식의 변신이 가능한가?

(유창혁 9단) “아니다. 기준과 방향이 있다. 첫째, 기전 규모가 5억원 이상일 경우만 상금제와 오픈전이 가능하다. 둘째, 5억 이하의 기전은 규모를 키우도록 설득하여 머지않은 장래 상금제와 오픈전을 전면 확대 실행한다는 계획이다.”

-비씨카드배는 규모가 작은 신예대회였다. 그것이 이렇게 커진 것은 상금제의 메리트 때문인가?

(유창혁 9단) ”그렇다. 비씨카드배는 상금만 7억5천만원이고 주관료와 행사비용을 합하면 전체 규모는 15억원 이상일 것이다. 상금제와 오픈전이 가능하면 예산을 대폭 키우겠다는 스폰서 측의 제의가 있었고 그 때문에 상금제가 더욱 추진력을 얻은 것도 사실이다.”

-상금제는 지난 10월 한국기원 프로기사회에서 투표에 붙여져 찬성 124표, 반대 34표, 기권 5표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동안 노장 기사들을 중심으로 반대의 목소리가 매우 높았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결과였다. 한국기원 이사회의 반응은 어땠나?

“상금제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벌써 5년 전이다. 당시 추진되었다면 지금 겪고 있는 바둑계의 위기도 맞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후 꾸준한 설득과 대화를 통해 기사들이 상금제의 필요성을 이해하게 된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사회에서는 당연한 변화로 받아들였고 수고했다는 말을 들었다.”

-상금제는 바둑계의 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위기’를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국제적으로는 일본에서 시작된 침체의 파도가 한국에 밀려오고 있고 중국도 이런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의 침체는 국가간 경쟁력 상실이 큰 원인 중 하나겠지만 다른 이유도 많다. 한국바둑은 ‘세계최강’이란 타이틀이 있어 외관상 건재해 보인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젊은 바둑팬, 유소년 바둑팬이 급감하고 있고 이 때문에 전국의 바둑교실 등 바둑 관계자들은 일제히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전망도 갈수록 어둡게 나오고 있다. 국가를 떠나 바둑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위기의 원인은 물론 지극히 복합적이다. 승부의 재미가 줄고, 관심이 떨어지고, 팬의 숫자도 줄고, 바둑 지망생도 줄고, 그래서 결국 스폰서들도 바둑대회의 홍보 효과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이런 총체적 난국 속에서 그 해소방안으로 상금제와 오픈전이 대두된 것이다.”

-추진 과정에서 수많은 반대가 있었다. 반대자들의 의견을 정리한다면?

“프로기사라면 누구나 오랜 역사를 지닌 대국료 제도가 사라지는 데 대해 생리적인 거부감이 있다. 또 프로기사는 바둑을 두면 지든 이기든 돈을 받았고 프로만이 대회에 나갈 수 있었으며 이게 프로와 아마의 분명한 차이였다. 하나 상금제와 오픈전은 이런 ‘선’을 무너뜨려 프로기사의 자존심이 크게 훼손된다고 생각한다. 전통이 사라지는데 대한 상실감, 그리고 변화와 개혁에 대한 두려움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젊은 층도 처음엔 반대가 많았지 않은가?

“그렇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혁을 하면 과연 나아질 것인가, 혹 프로기사의 입지만 훼손되고 얻는 것은 없는 게 아닌가 두려워했다. 또 스폰서가 칼자루를 쥐고 소수 일류기사만 상대하는 기전을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노장기사들은 상금제와 오픈전은 소수의 토너먼트 기사만 살고 평생이 보장되는 과거의 프로기사 제도는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결국 노장들을 도태시키는 제도라며 경제적인 손해를 보상할 대안을 원했다. 이런 인식의 격차가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다.”

-상금제와 오픈전은 단순히 위기에 대한 대응책인가. 상금제의 근본적 필요성, 상금제가 활성화될 경우 예상되는 효과 등은 어떤 것인가?

(유창혁 9단) ”첫째, 상금제와 오픈전은 경쟁의 극대화를 통해 바둑대회의 재미를 높여줄 것이다. 스폰서, 즉 기업의 홍보효과도 높아져 기업이 크게 투자할 매력을 갖게 된다. 오픈전이니까 한국 외에도 중국, 일본 등 외국에서도 홍보효과를 볼 수 있다.

둘째, 팬들의 관심이 높아진다. 이창호 9단이 컷 오프 되어 상금을 한 푼도 못 받고 탈락하는 일도 벌어질 것이고 연구생이나 아마 강자 등에서 벼락 스타가 출현할 수도 있다. 과거의 시스템은 변화가 늦고 새로운 스타가 빠르게 등장하기 힘든 구조다.

셋째, 64강 이상, 특히 10위권 이내의 스타 기사들은 과거보다 상금이 크게 높아져 프로기사의 사회적 위상도 올라가고 더불어 프로기사 지망생도 늘어날 것이다. 자연 바둑을 배우려는 유소년 숫자도 증가하고 그에 따라 토너먼트에서 소외된 많은 프로기사들이 보급과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기회도 넓어지게 된다. 이런 선순환(善循環)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일단 상금제가 첫 단추임이 분명하다. 모든 프로기사들이 전부 토너먼트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자명해진 사실이다. 이미 스폰서들은 10년 전부터 예선 대국료를 올리지 않고 있고 일본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라고 들었다. 스폰서들은 예선 대국료를 주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 예선 대국료 한두 판 값을 받기 위해 기전에 참가한다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니겠는가. 이보다는 역할 분담이 필요하며 프로기사는 다 똑같다는 기본 인식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류는 메이저 대회, 2류는 마이너 대회, 그 외에는 보급 식으로 말이다.

(※골프의 경우, 미국의 프로골퍼는 약 1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중 대다수는 보급을 통해 살아가고 실제 토너먼트에 나서는 숫자는 100여 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성적이 나쁘면 이듬해엔 토너먼트 참가권을 상실하게 된다. 바둑은 한번 프로 자격증을 따내면 성적과 무관하게 평생 토너먼트에 참가할 수 있다. 그러나 상금제가 도입되면 이런 참가권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 대신 연구생들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자격증이 없어 스탠드에서 경기를 구경만 하고 있었으나 오픈전을 통해 대회 참가가 가능해졌다.)

-오픈전은 실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프로대회에 나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메시지가 주는 효과는 아주 크겠지만 한국만 오픈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유창혁 9단) “일본은 바둑의 선진국이고 현대 바둑을 발전시킨 중심 무대다. 오청원 선생과 임해봉 선생, 조치훈 사범 등 외국인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며 세계바둑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근래 와서는 일본바둑이 점점 더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느낌이다. 일본이 오픈전에 동참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프로협회가 있는 모든 나라가 국경을 허물고 누구라도 무한경쟁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야 한다. 스폰서가 보기에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정도로는 큰 시장이 아니다. 한국은 강하니까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다. 바둑 그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세계바둑을 살리는 길은 오픈전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은 이미 기업 팀이 참가하는 한국리그와 중국리그를 열고 있다. 이 둘이 통합하지 못할 게 무엇인가. 중국은 어차피 성(省)과 성의 거리가 멀어 한국이 함께 참여한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다. 여기에 일본도 정예 팀을 구성해 참가하다면 좋지 않겠는가.”

-오픈전에 연구생이 참가하는 것은 참으로 획기적이다. 이것으로 지옥문이라 일컬어지는 입단대회의 병목현상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까?

“입단대회에 병목현상이 있고 연구생들의 실력이 프로를 능가한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현상이다. 하나 지금의 위기 상황이 이어지면 일본처럼 입단대회 참가자도 별로 없고 연구생 실력도 크게 약해지는 시대를 맞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 입단대회는 한해 10명 정도 뽑고 있는데 그 수는 절대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실력이 강할 때는 좀더 많이 뽑고 실력이 약해졌다고 생각되면 한 명도 뽑지 않을 수 있는 정책의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

-바둑은 판 전체, 즉 대세를 보는 게임이고 미래를 예측해서 수를 궁리하는 게임이다. 따라서 프로기사는 대세관에 누구보다 밝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실제 세계바둑은 지도자 들이 미래 예측에 성공했다고 보기 힘들다. 위기를 내다보지 못했고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변화를 꾀하기보다는 구태의연한 수로 일관했다. 이런 분위기를 생각하면 상금제 등 개혁이 과연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혹 중간에 암초를 만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창혁 9단) “프로기사는 아무래도 바깥 세상에 어둡다. 한국바둑도 지금 축에 몰려 개혁에 나서는 형편이 됐다. 바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을 때 개혁을 시작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나마 이번에 상금제와 오픈전에 대해 의견이 모아진 것은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적지 않은 선배 기사들이 우려를 표명하고는 있지만 상금제는 필연의 흐름이고 잘 될 것이라고 본다. 한, 중, 일은 물론 세계바둑의 관계자들이 모여 바둑의 미래를 놓고 더욱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 국경을 떠나 바둑인들이 뭉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고맙다. 장시간 인터뷰에 감사한다.


<인터뷰 후기>

‘유소년 바둑인구의 유입’이라는 물줄기가 점차 줄어들면 바둑이라는 ‘강’은 말라버릴 것이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무서운 일이지만 그나마 이건 5년이나 10년,혹은 20년 뒤의 일일 것이다. 당장의 위기는 바둑대회의 스폰서들이 바둑을 떠나거나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 머지않은 장래 프로기사가 되어도 몇 달씩 대국을 못하는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했었다.

다행히 상금제 개혁안이 한국기원 기사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이사회를 거쳐 결국 새로운 제도가 반영된 비씨카드배월드바둑챔피언쉽이 탄생하게 됐다. 이 사건은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세습으로 이어진 본인방가의 본인방이란 이름이 기전 이름으로 바뀐 것 만큼이나 놀라운 변화다. 바둑은 이제 무한경쟁의 정면 승부를 표방하게 됐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실력대결’이란 프로의 기본 원칙에 바짝 다가선 것이다.

한 노장기사는 “바둑은 예도이지 스포츠가 아니다.”고 말했다. 상금제는 스포츠엔 적합하지만 선생과 제자, 대가(大家)와 신참이 구별되는 예도의 세계엔 맞지 않다고 했다. 일견 수긍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바둑은 승부다. 예도의 향기로 인해 바둑이 더 높은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렇더라도 바둑에서 승부를 빼버리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리고 승부는 실력대결이 원칙이며, 공정함이 대원칙이며, 자격증 가지고 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바둑은 전자게임으로 인해 자꾸만 터전을 잃고 밀려나고 있다. 철학이 사라지며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사회 분위기도 바둑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기득권을 다 털어버리고 상금제와 오픈전이란 쓴 약을 마시기로 작정한 한국기원 프로기사 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고대로부터 만가지 놀이의 왕이었고 현대 서구에선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게임으로 칭송 받는 바둑의 부흥을 위해 건배하고 싶다. 상금제와 오픈전이란 쓴 약이 바둑을 구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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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홍순선 01-25 박치문 위원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바둑부 초창기 멤버로서 sbs 신병식 선배와 함께 바둑계의 발전에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