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바둑을 두는 일보다는 바둑두는 것을 이해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쓰여진 것이다. 바둑 두는 것을 실천적 행위라고 한다면, 바둑을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 실천적 행위를 설명하는 행위에 속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실천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행위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별개의 행위이다.
예컨대, 자전거를 타는 행위와 자전거 타는 행위에 대한 역학적 설명은 다르다. 돈을 버는 경제행위와 그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도 마찬가지로 다르다.
필자가 바둑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문용직 박사의 바둑의 이해라는 책을 읽고 나서이다. 문박사는 이 책에서 바둑현상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방식을 실험적으로 제시하고 있고, 그 속에는 기존의 사회과학 각 분야의 접근방식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바둑을 두면 머리가 좋아지는가 라든가 바둑을 두면 성격이 침착해지는가의 질문은 바둑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질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바둑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이나 역사학적 설명도 가능할 것이고 나아가서 경제학적 설명이나 윤리학적 설명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 중에서도 필자가 이 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둑(또는 바둑두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철학적 설명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간략히 언급하겠다. 

 


바둑에 대한 인과론적 논리적 설명

인간행위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이 인과론적 설명임에 비해서 철학적 설명은 논리적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과론적 설명이란 원래 자연현상(인간현상이 아니라)에 대해서 그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밝혀냄으로써 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뉴턴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현상을 보고 그 원인이 만유인력 때문이라는 설명을 제시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모든 물체에는 잡아당기는 힘이 있고 지구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지구라는 중력체의 당기는 힘이 원인이 되어 사과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인과론적 설명이란 원래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는 설명방식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인간이나 사회현상에도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각종 사회과학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등은 오늘날 대표적인 사회과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자연현상과 인간현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한가지 있고 그 이유 때문에 인과론적 설명방식이 인간현상에 적용되는 데에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과 달리 인간은 마음을 갖고 있고 인간은 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어떤 인과론적 설명방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행위나 현상을 빚어낼 수가 있다.
바둑을 예로 들어보자. 바둑을 두면 머리가 좋아지고 성격이 침착해진다(심리학적 설명)든가, 인간 관계가 좋아진다(사회학적 설명)든가, 특기를 살려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된다(경제학적 설명)든가 등등의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막상 사람들이 실제로 바둑을 배우고 틈만 나면 바둑을 두게 되는 이유는 이 어떤 것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그저 바둑이 좋아서 두고 싶어서 바둑을 둘 뿐이다.
다시 말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바둑을 두게 되는 진짜 이유는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어떤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바둑이 좋아서 재미있어서일 때가 보통이며 이것은 인가니 마음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물론 바둑은 하나의 게임일 뿐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가지 게임들 중에서 바둑이 왜 특히 더 재미있는 게임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과는 별도로 인간이 바둑을 두는 행위는 그 어떤 인과론적 설명방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그런 것들을 넘어서는 그런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바둑과 사고(思考)

그런다면 바둑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념 또는 아이디어는 과연 어떤 것인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것은 우선 게임 또는 놀이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또한 게임이라든가 놀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미 어떤 관념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어떤 관념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그 핵심을 여가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놀이나 게임은 여가의 산물이기도 하고 여가라는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나중에 잠깐 언급하겠지만 여가의 개념은 여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개념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일하지 않고 노는 시간 이상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필자가 보기에 바둑은 인류가 만들어낸 게임 중에서 최고의 게임임에 틀림없다. 다른 게임들이 모두 장시간 지속되면 곧 싫증을 느끼게 되어 있음에 비해서 이 게임은 그렇지가 않다. 다른 게임들은 얼마간 몰두하다가 보면 그 게임의 밑바닥까지 훤히 보이게 되고 그 후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동일한 수들을 거의 기계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이에 우리는 그 게임에 대한 흥미와 집중력을 잃어 버리게 되고 따라서 지속적으로 몰입하기 어렵게 된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게임을 지속하기 위한 외적 보상체제이다. 돈을 건다든가 다른 무슨 내기를 거는 것이 그것이다. 외적 보상이 게임 그 자체의 내적 흥미를 대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바둑은 다른 어떤 게임과도 다르다. 그것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집중력과 몰입을 요구하는 게임이고 무궁무궁한 내적 흥미를 그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게임이다.
흔히 기원에서 내기바둑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수들을 반복할 뿐 바둑게임 속에 들어있는 무한한 수의 가능성을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바둑 수를 제한하고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면서 바둑게임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외적 보상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다른 일(이를 테면 돈벌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질문은 바둑이 가지고 있는 이 내적 흥미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의 질문이다. 쉽게 말해서 바둑은 왜 다른 게임보다도 재미있는 게임인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둑이 사고의 게임이라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바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읽기의 게임이고 그 수읽기가 무한 대에 가까운 만큼 바둑의 재미도 거의 무한한 것이다.
이 수읽기라는 것은 바둑판 위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사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마치 기하학자가 수많은 평면도형들에 대해서 무한히 많은 사고를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는 대수학자가 수의 세계 속에서 무한히 많은 법칙관계를 생각해 가듯이 바둑두는 사람은 가로 세로 19로가 만들어 내는 361개의 착점 가능성을 놓고 흑과 백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사고를 바둑판 위에 쏟아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둑을 가리켜 사고의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바둑의 재미를 다 설명하기도 어렵거니와 나아가서 바둑의 철학적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에도 부족할 것이다. 이 양자를 다 충족하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게임으로서의 바둑이 가지고 있는 다른 측면들을 고찰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고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포함 고찰해야 한다.
후자는 잠깐 미루고 우선 바둑의 다른 측면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바둑은 반드시(즉 원칙상) 흑을 쥔 사람과 백을 쥔 사람 둘이서 벌이는 게임이다. 바둑에서의 모든 착점은 한편으로 상대방의 착점에 대한 응수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나의 착점을 통해 상대방의 착점을 유발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곧 흑을 쥔 사람과 백을 쥔 사람 각자가 매 착점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수읽기)을 반상에 표현한다는 뜻이고 서로가 착점으로 표현된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또 다른 착점으로 표현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원칙상 상대방의 생각에 대한 고려가 배제된 착점이란 있을 수 없다. 이 점에서 바둑은 의사소통의 게임이라 부를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의사소통 행위 중에서 가장 명증성을 갖는 게임이라고 불러도 좋다.
여기에서 명증성이라는 말은 영의 투씨디티(lucidity)의 번역어이다. 두 사람간의 의사소통 관계에서 서로가 상대방에게 의중을 정확히 전달하고 이를 정확히 받아들이는 관계를 영어로는 루씨드(lucid)하다고 말하는데 바둑이라는 게임의 본질이 바로 이 루시디티를 추구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물론 이것은 바둑이라는 게임의 성격이 원래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실제로 두어지는 모든 게임에서 루씨디티가 보장되어 나타난다는 뜻은 아니다. 바둑을 두는 두 사람의 자세나 집중력의 정도에 따라서 이것은 달리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이고 루씨디티가 추구되는 정도에 따라서 바둑의 질과 재미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명백히 고수의 바둑일수록 명증성의 추구와 그 실현정도가 강하며 하수의 바둑일수록 그렇지가 못하다. 접바둑의 경우 수읽기에서의 차이가 많이 나는 여러 점 접바둑일수록 명증성의 정도는 떨어지기 마련이고 넉 점 이상의 접바둑은 바둑이 아니다는 것과 같은 말이 생겨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이 바둑을 가리켜 수담(手談)이라 부른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우려로는 이것이 혹시 일본식 표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지만 그것이 어느 나라 표현방식인지를 떠나서 필자의 논지를 드러내는 데에는 매우 적합한 표현임에 틀림이 없다. 바둑이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면 여러 점 미리 놓는 접바둑은 마치 어른과 아이의 대화처럼 고수 쪽에서의 상당한 이해심과 인내 없이는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교육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바둑일 때는 별개의 문제이다.
여하튼 여기에서의 한가지 논지는 바둑은 인류가 창안해낸 게임 중에서 최고 수준의 명증성을 갖는다는 이유 때문에 최고의 게임이라는 것이다. 

 


바둑과 여가

현대인에게 여가는 노동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을 뜻하게 되었다. 여가는 노동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당시의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가를 뜻하는 스콜레(scole)가 상위이고 노동이 그에 종속되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노동을 뜻하는 아스콜리아(ascolia)는 스콜레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a가 붙어서 생긴 말이었다. 또 고대 그리스어에는 여가한다(solen agein)는 동사형도 있었다. 즉 고대인들은 여가하다가 남는 시간에 노동을 한 것이다. 그 만큼 인간의 생존가치는 노동이 아니라 여가에서 찾아졌고 이 여가의 산들이 차란 했던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 여가가 차란한 문명을 낳았던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이유는 간단하다. 사고의 본질적 속성이 원래 여가이기 때문이다. 노동에 찌든 삶이 사고 할 여유를 갖지 못하듯이 경제적 재화의 생산과 그 소비에 얽매인 삶은 참다운 사유와 여가를 향유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점에서 바둑은 역시 최고의 게임 지적(知的) 게임임에 틀림없다.

 
김안중(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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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홍순선 11-13 김 교수님은 서울대 바둑부 지도교수이셨습니다. 동경대 교류전과 아시아대학 선수권대회 때에도 함께 가셨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