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한 조남철 9단…현대바둑 터닦은 ‘반상의 개척자’





“이 사람아, 그 대마는 조남철이 와도 못 살리네. 돌을 던지게.”

1970년대 중반까지 동네 기원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조남철’이란 이름은 곧 ‘최고수’로 통했다.


조남철 9단이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그가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이자 당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광복 후 한국기원 창립, 프로기사 제도 도입, 최초의 정규 기전인 국수전 창설 등 한국 바둑사는 그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조 9단은 2004년 발간된 ‘조남철 회고록’에서 “바둑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일념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생전에 그는 “나는 평생 세 번 울었다. 일본 유학 시절 나라 없는 설움을 느꼈을 때, 6·25전쟁 와중에 운영하던 기원이 폭격에 무너져 내렸을 때, 1967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한국기원을 세웠을 때”였다고 말할 만큼 ‘바둑 입국’에 대한 의지를 갖고 이를 실천했다.


그는 1937년 14세에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나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 문하에 들어갔고 18세에 입단한 뒤 194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인 1945년 서울 중구 남산동에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을 세우면서 ‘국제 경기에 대비해 순장바둑을 폐지하고 현대바둑으로 대체한다’ ‘내기바둑을 금하고 건전한 국민 오락으로 보급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950년에는 최초의 단위(段位) 결정 경기를 열어 13명의 초단 기사를 배출하는 등 프로기사 제도를 확립했고 1956년에는 국수전 창립에도 참여했다.


그의 또 다른 공로는 후진 양성에 기여한 것.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9단 등 재능 있는 기사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해 한국바둑의 실력을 비약적으로 키웠다. 그의 집안에서만도 일본에서 활약하는 친조카 조치훈 9단과 큰형의 외손자인 최규병 9단, 이성재 7단이 나왔다.


일본 바둑책의 번역판이 나돌던 시절 ‘바둑개론’(1954년)을 시작으로 ‘행마의 기초’ ‘포석의 요령’ 등 27권의 책을 펴내 아마추어 바둑 팬들의 갈증을 푼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공이다. 그는 ‘바둑은 모양이 좋아야 한다’ ‘거북등 빵때림’ ‘쌈지뜨면 지니 대해로 나가라’ 등 어지간한 바둑 애호가라면 금언으로 외우는 말들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바둑 보급과 후진 양성에 앞장서느라 정작 자신의 공부를 위한 시간을 내기는 힘들었다. 1966년 국수 자리를 후배 김인 9단에게 빼앗기자 “이제 내 공부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도전기에서 활약했지만 1972년 서봉수 9단에게 명인위를 빼앗긴 뒤엔 다시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4년 71세의 나이로 국기전 본선에 올라 최고령 본선 진출 기록을 세우는 등 현장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조 9단의 통산 전적은 460승 486패.


그는 1983년 뒤늦게 9단에 승단했고 198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별세할 때까지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을 맡았다.


조 9단의 제자인 고재희 7단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큼 명예를 중시하던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국수전 산파역… 9년 연속우승 ‘전설’


■ 조남철과 국수전


소년 조치훈과 대국
조남철 9단이 1962년 친조카인 조치훈(당시 6세)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직전 기념대국을 벌이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기원



조남철 9단은 국내 기전의 효시인 국수전 탄생의 산파역을 맡았다. 1950년 프로기사 제도가 도입됐지만 기사들이 활약할 정규 기전이 없자 동아일보사와 손잡고 국수전의 전신이자 국내 최초의 기전인 ‘국수 1위전’을 1956년 창설한 것. 고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국수전 창설 이후 신문에 정기적으로 기보가 실리면서 바둑 보급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며 “이후 서울신문 패왕전(1959년), 부산일보 최고위전(1960년) 등 신문 기전이 경쟁적으로 생겼다”고 밝혔다.


1기 ‘국수 1위전’은 16명의 기사가 각축을 벌인 끝에 조 9단이 전승으로 우승했다.


2기 국수 1위전에선 민영현 2단이 도전자가 됐으나 조 9단은 4연승을 거두며 우승을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특히 민 2단과의 도전 1국의 경우 대국 당일 바둑 수순을 KBS라디오로 생중계하는 파격적 이벤트로 화제를 모았다.


조 9단은 이어 김인 이창세 윤기현 등 젊은 기사들의 도전도 모조리 막아 내며 9연패를 달성했다. 김인 9단은 1962년 도전기에서 1승 1무 3패로 조 9단에게 패한 뒤 기력 연마를 위해 절치부심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조 9단은 마침내 1966년 10기 국수 1위전 도전 5번기에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 김 9단에게 1승 3패로 패해 타이틀을 넘겨줬다. 국수전 9연패의 대장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동아일보사는 1995년 조 9단에게 ‘명예 국수’ 칭호를 수여했다. ‘명예 국수’는 조 9단이 유일하다.


2006.7.3 동아일보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올해는 우리나라에 현대바둑이 도입된 지 61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 바둑의 총 본산이라 할 재단법인 한국기원이 1945년 11월 조남철 선생이 서울 남산동에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漢城棋院)을 설립한 시기를 우리 현대바둑의 효시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1923년 전북 부안군 줄포에서 출생한 조남철 선생은 1937년 14세의 나이에 도일하여 명문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의 문하생으로 입문, 각고의 노력 끝에 1941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기원 전문기사가 됐다.

일본에서 프로기사로 활동하시던 선생께서는 1944년 귀국, 이듬해 11월 서울 남산동에 한성기원을 설립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현대바둑의 씨앗을 뿌렸다.

 

당시 한성기원을 설립하시며 선생은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원칙으로 삼으셨다.

① 국제시합에 대비하여 순장바둑을 폐지하고 현대바둑으로 대체한다.
② 내기바둑을 금하고 건전한 국민오락으로 보급한다.
③ 장차 일본기원과 같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기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기도보국(棋道報國)'의 원대한 뜻을 품고 출범한 한성기원이었으나 이후 바둑을 건전한 국민오락으로 보급하기 위한 노력은 많은 난관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한성기원은 이후 1948년 조선기원으로, 이듬해 대한기원으로 개칭하였으며 1954년 사단법인 한국기원에서 1969년 오늘날의 재단법인 한국기원에 이르기까지 4차례나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68년 종로 관철동에 한국기원 회관이 건립되기까지 무려 16회나 이전을 거듭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한국 현대바둑의 여명기를 지나 발흥하기까지 선생께서는 일생을 바둑계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헌신했다. 선생께서 우리 바둑사에 남기신 빛나는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나 그 중 각별히 주목할 만한 몇몇을 정리해 보았다.


* 한성기원에서 사단법인 한국기원까지

1945년 11월 한성기원 설립을 시작으로 1954년 사단법인 한국기원이 발족하기까지 선생께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원의 창설을 목표로 일로매진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 피난지에서조차 대한기원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환도 후 대한기원을 발전적 해체하고 사단법인 한국기원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사단법인 한국기원회관 설립.

* 단위 결정 대회

1950년 6월 대한기원에서 최초의 단위 결정시합이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아직 ‘전문기사'라는 개념이 자리잡지 못했던 당시 처음으로 전문기사를 인정하고 그 단위의 서열을 정한다는 큰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대회 결과 선생(3단)과 함께 13명의 초단이 탄생하여 우리나라에도 전문기사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 한중 바둑교류전 개최

1955년 3월 제1회 한중(대만) 바둑교류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대회였다. 당시 선생은 민영현, 김봉선, 장국원 등과 함께 대만에 원정하여 압승을 거두고 귀국, 전 국민들의 가슴에 뜨거운 자긍심을 심어 줬다.

전후(戰後) 혼란의 시기에 열렸던 이 대회는 민심수습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 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시범대국을 보였던 경무대 대국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 기전의 탄생 : 국수전

1956년 오늘날 국수전의 효시인 국수제1위전이 탄생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기전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

선생께서는 초대 우승 이후 9기 대회까지 무려 9연패를 달성하여 ‘무적의 조남철 시대'를 구가했다. 초대 명인, 최고위전 7연패 등 요즘과 달리 기전의 수가 보잘 것 없는 시대였음에도 생애 통산 30회 우승을 기록, 후진 김인 9단이 등장하기까지 우리 바둑계 제1의 강자로 군림했다.




▲ 조남철 9단(오른쪽)과 김인 9단의 대국 모습.


* 후진 양성

일본의 명문 기타니 도장에서 수학하셨던 선생께서는 일본의 선진 바둑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후진들의 일본 유학을 적극 지원하심으로써, 오늘날 우리 바둑이 극일(克日)을 통해 세계 최강의 수준에 오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선생의 노력으로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조치훈 등 뛰어난 젊은 기재들이 일본 유학을 통해 선진 일본바둑의 기술을 습득, 장차 바둑계의 일세를 풍미하는 거인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 한일교류

60년대는 일본이 현대바둑의 종가를 자처하며 최고의 기술과 바둑환경을 과시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은 후발국인 우리나라를 되외시하고 중국과의 교류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선생께서는 비록 굴욕감이 없지 않으나 장차 극일을 위해서는 선진 일본바둑을 배워야 함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시고 한일 바둑교류의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하셨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해 12월 서울 한국기원에서 제1회 한일 대학생 친선바둑대항전을 시작으로 66년 8월 한일 고교생바둑대회, 67년 한중일 동양3국 고교생대회, 69년 한일 프로교류전까지 선생의 노력은 한일 양국 간 활발한 바둑교류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 조남철 9단(오른쪽) 대 조치훈 9단의 대결 모습.


* 바둑 용어의 확립

1954년 선생의‘위기개론(圍碁槪論)'이 출간됨으로써 한국식 바둑용어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오늘날 바둑계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도 흔히 사용되는 바둑의 용어들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 용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후 선생께서는 행마의 기초, 행마의 급소, 정석정해, 포석의 요령 등 우리 바둑 출판물이 전무하던 시절 주옥같은 저서들로 국내 바둑팬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러한 선생의 저서들은 일본 무단 복제판이 판치던 국내 바둑 출판시장에 ‘토종 바둑서' 출간 붐을 일으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 한국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타계 )


[ 조남철 9단 연보 ]

1923.11.30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에서 출생

1937.11.03

渡日, 일본 기타니 미노루 9단 문하에 입문(14)

1938.01

일본기원 연구생이 되다

1941.04

일본기원 프로기사 입단(18)

1944

귀국(21)

1945.04

부안에서 최충순 여사와 결혼

1945.11

한성기원 설립(서울 남산동)

1948.05

사동궁으로 이전, 조선기원 발족

1949.11

종로2가로 이전, 대한기원으로 개칭

1950.06.20

최초 단위결정 시합(조남철 3단 및 13명 초단 탄생)

1951.01.04

군 입대, 한국전쟁 참전

1951.08.15
명예 제대
1954.01.17
대한기원을 발전적 해체하고 한국기원 창립
1954.06.20
제1회 입단대회 개최
1955.03.01
제1회 한중 바둑교류전 출정(한국 첫 국제기전)
1955.06.20
송원 위기연구소 설립
1955.12.15
'위기개론' 출간 (바둑용어 정립)
1956.04.15
제1기 국수1위전 개최(최초 공식 프로기전)
조남철, 64년까지 국수 9연패 달성
1956.10.15
엽합신문 치수고치기 시작( 대 김봉선)
1956.12.27
전문기사회 발족 ( 총 11명 참가)
1957.10
제2기 국수1위전 도전기 라디오 생중계
1960.01
제1기 최고위전 우승
67년까지 대회 7연패 달성
1962.09

渡日, 후지사와 슈코 명인, 사카다 에이오 본인방과 대국

1963.11.26
'행마의 기초' 출간
1964.07.22
베스트 셀러 '행마의 급소' 출간
1964.10.05
일본기원으로부터 감사장 수여
1967.11.05
한국기원 관철동 회관 기공식
1968.08.01
한국기원 관철동 회관 개관
1983

9단 승단

1984

일본 大倉賞 수상

1989.10.20
은관문화훈장 서훈
1994.11.23
제18기 국기전 본선진출(최고령 본선 진출기록)
1998

雲耕賞 문화언론 부문상 수상

2004.01

2003 바둑대상 특별공로상 수상